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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비록 => 이수광 지음

더카나(더날카로운나) 2017. 11. 8. 14:29

 

서애 류성룡의 임진왜란 비망기

여해는 이순신의 자.

하회에서 태어나 어릴적 부친 따라 한양와서

이순신과 함께 마른내(건천동 을지로5가)에서

서당을 다녔다

류성룡 집이 한양의 동쪽이라 동인의 영수.

이산해와 대립하며 정철을 변호하여 동인이

남인(류성룡)과 북인(이산해)으로 갈라짐

임진년 4월13일 왜구 침입

안동김씨 외가의 기운을 받아 사촌에서 태어나 어릴적

집안인 안동하회에서 지내고 소년시절 부친을 따라

한양와서 이순신과 함께 마른내(건천동 을지로5가)에서

서당을 다녔다

과거급제 후 문서 관련 일을 담당하는 승문원에서 업무 시작.

선조때에 기록을 관리하는 기사관에 근무

28세 사절단으로 연경(베이징) 방문

29세 스승 이황 별세

어릴적 아산으로 이사간 이순신은 학문과 무예를

닦은 후 과거 시험보러 한양와서 다시 류성룡과 재회한다

어릴적 앙금이 있던 김효원과 심의겸은 조정에서도

동인(건천동의 김효원)과 서인(정동의 심의겸)으로 나눠졌다

32세에 부친상. 이순신 32세에 무과 급제.

율곡 이이는 병조판서 재직 중 과로와 탄핵으로 49세에 사망. 이 때 류성룡 48세

경상도 관찰사, 승정원 우승지, 도승지, 사간원 대사간(검찰총장) 역임.

영의정 이산해, 서인의 영수였던 좌의정 정철의 뒤를 이어

류성룡은 우의정에서 좌의정이 됨.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승진시키고,

원균을 경상도 좌수사로 임명하여 일본 침략을 대비

임진년 벼슬에 이르지 못한 허균은 류성룡에게 문장을 배웠다

서애는 동인의 영수이지만 붕당에는 불참

일본 통신사로 다녀온 황영길은 일본이 전쟁 준비중이니

대비해야한다 아뢰지만, 김성일은 반대로 아뢴다

왜란이 일어나자 서애는 체찰사(비상시 임명된 군지휘자 벼슬)로 임명되어 전군을 지휘

전란 중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

도승지 이항복의 주청으로 선조를 옆에서 몽진을 호종한다

신립의 조령(문경새재) 실패, 용인 방어 실패로 군무에서

손을 떼게 됨

육군이었던 원균은 엄청난 왜의 함선을 보고 수군의

무기와 병선을 버리고 지상군으로 후퇴.

왜군 병선 70여척을 수장시킨 한산도 대첩.

서애는 공명책(공을 세운 자 명단)을 적어 역부들을 관리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하여 대피했으며 평안도외

타지역은 모두 왜에 점령

명군 조승훈이 5천 군사로이 평양성을 공격하나 대패함.

서애는 전시 총사령관 격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을 지휘

이여송의 5만 군사가 평양성 공격하여 퇴로하는 왜군을

전멸시켜 전쟁을 종결시키려 했으나 협공하지 않은

김경로에 의해 실패

권율의 행주대첩 후 명과 왜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명의 이여송은 공격을 지체하였다

3천8백의 군사로 3만 왜군을 막은 진주대첩의 김시민

퇴각하던 왜군과 밤낮 5일간의 공격을 막다가 점령당하고

기생 논개는 적장과 남강에 몸을 던짐

명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라하자 서애가

외교술 발휘 중국인을 설득.

이순신에 의해 왜의 해상 보급이 차단되자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아들과 조카가 암살되고 왜의 공작으로

한양에 압송된다

이틈에 왜 재침입 정유재란 발생하자 이순신을

삼도 통제사로 임명하여 왜와 대적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경계하기위해 철병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는다

삼사의 탄핵(모함을 해명하는 사신으로 명에 가지않음)으로

재상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돌아온다

명량해협 울돌목에서 13척의 병선으로 2백여척

왜선과 싸워 대승

1598년11월18일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이순신은 죽었다

서애 류성룡은 안동 하회에서 징비록을 남기고 세상 하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