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졸업
경기대학교 건축 대학원 교수로 한국 근대 건축의 역사와 이론 연구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서재필이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사회단체인 독립협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기 위해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1895년에 철거하고 고종이 아관파천(1896)한 사이 왕태자의 후원과 모금으로 1897년에 독립문을 세웠다
1897년 초가 등으로 흉물이었던 원각사 터에 서울 최초의 공원인 탑골 공원이 등장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도시환경 개선과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도시 공원이 생겼으나 1887년 초대 주미공사였던 박정양과 이완용을 이어 제3대 주미공사로 지낸 한성판윤 이채연은 근대 도시의 상징으로 탑골 공원을 건설하였으며 고종은 탑골공원과 독립신문을 정부와 국민 사이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랬다
1896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도로 정비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진행 중 도로 주위 가게에게는 적당한 보상을 하였다
도로, 공원, 위생 등의 사업은 근대 도시 계획의 세계적인 움직임과 큰 시간차 없이 진행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창덕궁, 창경궁을 수리하는 동안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정하면서 수리와 확장하여 광해군은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창덕궁이 완공되어 정궁으로 정하고 경운궁을 이궁으로 하였으나 광해군은 경덕궁(경희궁으로 명칭이 변경됨)을 새로 지으면서 경운궁의 일부 전각을 헐어 재료를 경덕궁 건설에 사용하였으며 인조반정 후 인조는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한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고자 수리를 명하였고 정문인 인화문과 침전인 함녕전, 준명당을 건설하면서 궁의 최소한의 격을 갖추었으나 기존 건물로 인해 규모 확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한은 우리 고유 한나라 이름이며 삼한을 병합했기에 국호를 '큰 한'이라는 의미의 '대한大韓'으로 하고 연호는 부국강병의 의지를 담은 '광무'를 새롭게 만들었으며 이로써 경운궁은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첫 황궁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일본 천황, 중국의 황제에 동일한 위상을 갖추기 위해 하늘에 제를 올리는 환구단을 건설하였으며 황궁우(황천상제, 황지기, 태조 고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곳), 삼문, 황구단은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해서 궁역 밖에 석조각과 칭경기념비전도를 건설하였다
덕수궁(경운궁)은 근대 도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대한제국에서 계획 건설하였기에 기존의 궁과 달리 황궁을 중심으로 도로가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은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가 있고, 창덕궁의 돈화문은 '교화를 돈독히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창경궁의 홍화문은 '조화를 넓힌다'는 의미가 있고, 경희궁의 흥화문은 '교화를 복돋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운궁 중건 당시 정문은 인화문이었지만 문 앞 길이 좁고 불편하여 대한제국 출범 직후인 1898년에 대한문(1900년에 궁궐 정문이 되었으며
대안문에서 1906년 고종의 명으로 대한문으로 바뀌었다)을 건설하였으며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의미로 대한제국이 지향하는 바를 담고 있다
경운궁에는 정문이 두 개여서 궁궐의 신성한 영역을 외부와 내부로 구분짓는 금천교 또한 두 개이며 현재는 중화전과 중화문 사이 금천교는 존재하지 않고 대한문 앞 금천교가 현존하고 있다
서울 광장까지였던 궐내각사가 1912년 태평로 확장과 1933년 덕수궁의 공원화 과정에서 철거되어 많이 축소 되었다
궐내각사 중에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의정부에서 국정을 맡고 왕실 행정을 맡는 궁내부를 신설하였으며 원수부를 장악하여 황제가 군 전체를 총괄하게 되었다
궁궐의 정전에 이르기 전 세 개의 문이 있는 삼문체제에 의거 덕수궁은 대안문ㅡ조원문ㅡ중화문이었이었으나 덕수궁 공원화 과정에서 조원문이 철거 되었다
삼조는 외조ㅡ치조ㅡ연조로 연속되는 세 개의 공간을 가르키며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근무하는 공간으로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있는 궐내각사와 의정부 및 원수부가 해당되며 치조는 왕과 관료들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 정전과 편전으로 중화전을 중심으로 중화문과 회랑이며 연조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의 일상 생활 공간으로 침전인 함녕전 등이 있다
중화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출범 후 정전의 필요성을 느껴 건설을 지시하여 1902년에 완공하였으며 경복궁의 근정전은 '나랏일에 부지런하라'라는 의미를 담고, 창덕궁의 인정전은 '어진 정치를 편다'는 의미가 있으며, 창경궁의 명정전은 '정치를 밝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궁의 정전에는 돌림자가 들어가 올바른 정치를 통해 나라 다스리기를 염원하지만, 덕수궁 중화전에는 돌림자가 없으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으로,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라는에서 유래됐다
1902년 완공된 2층 중화전은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발화된 화재로 중화전, 함녕전, 선조 이후 보존해 오던 준명전, 즉조당, 석어당, 등이 소실되자 1906년 단층의 중화전을 재건하였다
중화문의 답도에는 예전 궁궐에 봉황이 새겨져 있는 것과 달리 용이 새겨져 있고 양편에는 석수가 놓여 있어 중화전이 황국의 정전임을 보여준다
조정의 정4품석 주변에 구멍 뚫린 박석은 첫 금천교가 대한문 위치로 이전하고 중화전이 건립되면서 복개된 위치 표시이다
중화전은 단층이지만 월대는 이중이며 답도에는 용이 새겨져 있고 황제가 임어(임금이 그 자리에 임함)하는 용상의 당가 천장에 쌍용이 설치되어 있고 화재 방지용으로 월대에 있는 물이 담긴 큰 항아리에 적힌 '희성수만세'는 근대 이전에 황제를 위해서만 사용하던 말로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황제국이기 때문에 3.1운동에서 만세운동에 만세를 붙힐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화전의 지붕에는 재앙을 막기 위한 취두와 잡상이 있으며 내부에는 어좌와 그 위에 당가,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가 있으며 오악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산으로 전국토와 왕의 권위가 미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일본은 고종을 퇴위 시키고 순종이 2대 황제로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고 고종은 경운궁에 거쳐하였다
즉조당과 석어당은 선조의 시서소(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집)로 사용되었던 곳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엊즉조당이라 부르며,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 순종 역시 이곳에서 즉위식을 시작하였다
즉조당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하였고 준명당은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 할 당시 신하나 외국사신 접견용으로 새로 지은 것이며, 고종의 총애를 받던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석어당은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경운궁에서 남은 유일한 2층 전각이며 인목대비가 유폐된 곳이며 광해군이 인조에게 옥쇄를 건넸던 곳이다
1900년에 공사 시작하여 1910년에 완공한 석조전은 중화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으며 대한제국 주도로 지은 양관이며 덕수궁의 어여한 주인이자,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 국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기간 동안 많은 등대를 설게한 영국인 하딩이 2년간 설계를 하였으며 그리스의 신전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하1층, 지상2층 건물로 1층은 접견실,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 및 거실, 지층은 시종들이 거처하는 방이며 일제의 강제합병으로 황국의 전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광명문은 함녕전 권역이 해제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광명문에는 물시계와 신기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 황제 서거 후 일본은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후 석조전을 잇대어 서관을 지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덕수궁 내 서양식 건물로 석조전보다 먼저 지어진 정관헌과 중명전이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구성헌과 돈덕전이 있다
정관헌은 1901년 이전에 지어졌으며 태조의 영정을 모시기도 했고 고종의 휴식 공간으로 여겨지며 전통적 지붕의 기본틀이 유지되고 곳곳에 우맂문화의 장식이 존재한다
함녕전은 1897년 러시사 공관에서 환궁할 당시 왕의 침전이었으며 1904년 대화재의 발원지이자 고종이 승하한 곳이며 계단식 정원과 전돌로 만든 유현문이 있다
덕홍전은 명성황후의 경효전이 있던 곳으로 고종 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편전으로 사용하였으나 내부가 서양식과 일식으로 개조 공사되었다
경운궁에서 구성헌과 함께 오래된 양관인 수옥헌은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때 일시적으로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여 중명전으로 바뀌었으면 후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축한 것이 현 중명전이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 중명전이며 또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장소도 중명전이며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은 강제 퇴위 당한다
덕수궁은 경희궁과 연계를 위해 운교를 두었으며 경희궁은 1860년에 철종이 6개월 머물러 궁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후 훼철되어 1910년까지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황학정이 남아있었으며 경희궁은 경복궁 중건에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919년 태황제 고종이 서거하자 일본은 창덕궁의 순종보다 대한제국의 구심 역할을 하는 덕수궁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도로 확장 과정에서 선원전 건물을 철거하고 덕수궁 토지를 매각하였으며 1930년에는 덕수궁의 절반 정도 영역을 '중앙공원' 건설 계획을 추진하여 많은 부분의 건물이 헐려 나갔다
석조전은 1933년부터 1943년까지 '이왕가 덕수궁 일본 전시품 전시'로 쓰이다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로 사용
덕수궁의 덕수는 태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된 것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황위를 양위 당한 것에 비견된다
무능한 군주로 여겼던 고종이 서구를 모델로 한 근대 국가를 지향했던 대한제국의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 광장보다 대한문 앞 광장
궁궐로 13년
경운당은 준명당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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