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1913.3.26~1974.7.25) 탄생 100주년 기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70년 뉴욕에서 그리움, 슬픔, 기쁨,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은 대한민국대전에 출품 되었고 제목은 친구 김광섭의 시에서 인용했다
전남 신안군 안좌도 천석지기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나 도쿄에서 중학교 5년을 유학 다녀와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하고 1932년 12월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
동학농민운동 때 안좌도에 들어온 김상현은 1910년 백두산 나무를 가져다 가옥을 지었으며 현재문화재로 되어있다
일본에 도착한 김환기는 진로를 고심하다 20 살에 니혼대학 미술부에 입학하여 석고 데생을 시작했으며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후에 SPA양화연구소로 명칭 변경)에 들어가 김병기를 알게되었다
졸업반이 되어 일본 화단에서 인정하는 재야 미술 단체 이과회가 주관하는 이과전에 출품하기 위해 고향의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그린 '종달새 노래할 때' 제목의 작품이 입상 하였다
23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니혼대학에서 조교로 어린 학생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인맥이 없는 경성보다 도쿄에서 미술 동인 조직인 백만회에서 활동하며 실력을 키웠다
23회 이과전에 출품한 '25호실의 기념' 작품이 입선하였고 이후 구상과 추상을 구분하기보다 경계를 무너뜨려 한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1937년 24살 김환기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 일본 근대 화단의 한 축이 되는 자유미술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그해 변동림과 결혼한 천재 시인 이상은 도쿄대학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부모의 기대와 달리 셋째 딸 정인이 태어났다
조선일보 이헌구 기자와의 인터뷰 계기로 한때 문학을 꿈꿨기에 문학지나 잡지의 표지화를 많이 그렸으며 문인들을 소개받기도 했다
안좌도에 있으면서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후에 미술창작가협회로 변경)에 출품하고 경성에 전시회에도 둘러 보며 추상에 열중하였다
조선지부장 김환기가 주도한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이중섭 유영국 등 많이 출품하였지만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폐간에 추상미술이라 홍보가 되지않았으며 소 그림을 출품한 이중섭은 극찬이 있었지만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
향안ㅡ고향언덕이라는 뜻으로 김환기가 일본에서 귀국 후 만든 아호인데 집안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한 변동림이 김향안으로 개명하여 쓰고 김환기는 수화로 아호를 사용
김환기는 조선의 정서, 조선의 특색, 조선의 마음을 찾기 위해 금강산을 찾아가고 평양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반추상화로 나타내려 노력했다
금강산을 다녀와 조국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일제는 전시체제 명목으로 경성미술가협회를 결성 화가들의 가입을 독려했으나 김환기는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걸어갔다
1942년 김환기 29살에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시자 약 20만 평(당시 싯가 2만 원ㅡ서울 집 한 채 2천원으로 10채 가격)에 대한 소작농의 빚문서를 무료로 돌려주었고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에게도 일정 금액을 주고 이혼하였다
화가 야마구치의 소개로 시인 노리다케 가츠오를 만났으며 그는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시집<사슴>의 저자인 백석하고 친분이 깊다고 한다
노리다케는 김삿갓의 시를 출판하기 위해 김환기에게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부탁하였지만 거절한다
노리다케의 소개로 서로 알게된 김환기와 변동림은 편지로 안부를 나눈다
<봄이 강남에서 온다는데 그 강남이 어딘지, 아마 우리 섬이 강남이라면 서울의 봄도 우리 섬에서 보내드린 것입니다ㅡ김환기가 변동림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김환기의 딸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학교에서 퇴학 당했다
이화여전을 나온 엘리트인 변동림이 소실의 딸이자 이상과 결혼한 경험이 있어 김환기 집안에서 반대했고 김환기의 조강지처가 살아 있다하여 변동림 집에서도 반대하여 경성에서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1944년 안좌도 땅을 일부 정리하여 경성에 늙은 감나무가 있다하여 붙여진 노시산방(훗날 김환기의 호인 수화와 김향안에서 이름을 따 수향산방으로 김용준이 새로 지어 주었다)인 김용준 집을 사서 신혼집으로 하고 이헌구 기자의 조언으로 그림을 전시와 판매를 할 수 있는 종로화랑을 운영하기 위해 개관하여 전시회를 개최
화랑일을 하면서 수수하고 소박한 자태가 조선의 마음을 닮은듯한 백자와 목가구에 빠져 사들였다
1946년 김용준의 추천으로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가 된다
1948년 안좌도 어머니를 모셔 오면서 전답을 정리하고 성북동 수향산방에서 원서동 양옥집으로 이사했다 다음해 훗날 간송미술관이 된 전형필의 보화각 위쪽에 위치한 성북동 한옥으로 이사했다
1950년 민족 미술 발전을 위해 `50년미술협회`를 결성하여 전시회 개최 일주전 6.25 발생으로 취소 되고 김용준과 길진섭은 북으로 갔으며 정지용은 소요산 부근에서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김환기는 피난을 떠나기 전에 백자 항아리를 우물 속에 숨겨 두었고 아끼던 소반은 선반에 두었으나 전쟁 후에 돌아오니 모두 사라져 안타까워 했다
전쟁 동안 어머니와 아이들은 안좌도로 보내고 김환기는 종군화가단에 들어갔으며 1946년 김환기가 심사한 `조선종합미술전람회`에서 <꿈>이라는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은 이준의 부산집 다락방에서 부부는 생활하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과 전시회를 하였으며 이때 미국정보원 브루노를 알게 되어 도움을 받았다
백자를 아끼는 김환기와 국립박물관 최순우 학예관은 서로 뜻이 잘 맞았으며 최순우는 1회 현대미술작가전에 출품작 판매에 노력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우물속 백자는 대부분 금이 가거나 깨졌고 광에 있던 백자와 양반이 쓰던 호랑이 다리처럼 만든 호반이나 개다리 소반은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많이 아쉬워 했다
서울에 다시 자리잡은 홍익대에 교수가 되었고 김환기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고졸 출신인 최순우는 홍대에서 고미술 시간강사로 강의 했다
독창적인 양식과 수법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은 김환기의 그림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라 그림 판매가 되지않아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안좌도 전답을 헐값에 팔고 김환기는 표지화, 김향안은 원고 청탁 일을 받아 하면서 백자 그림에 매진하였다
1955년 1월 주위의 도움으로 이중섭이 첫 개인 전시회를 미도파화랑에서 열어 작품 한 점은 쌀 세 가마니 값(당시 대학 교수 한 달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음)으로 정해놨다ㅡ이때 김환기는 `이중섭 개인전`팸플릿 추천사를 써주었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연 전시회에서 그림판매가 성공리에 마쳤지만 대부분 외상이라 일본 갈 여비 마련 실패에 크게 절망을 하고 의욕을 잃어 병원을 전전하다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났다
김환기는 자신의 그림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를 원해서 프랑스 파리에 가고 싶다 하자 그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통역이 가능했던 김향안은 자기가 먼저 가서 화상이랑 전시장 알아 보겠다하자 남은 마지막 재산인 성북동 집을 팔아 여비를 마련 하여 부인을 먼저 보내 슬라이딩으로 그림 소개하여 전시장을 구해 초청장 받아 1956년 그동안 그린 그림을 가지고 파리로 출발한다 이날이 어머니와는 마지막 인사였다
파리에서 캐나다 화상을 만나 1년간 채재비와 제작비 지원 조건으로 다음해에 가기로 약속했으나 배편 중단으로 취소 되었다.
센강변 베네지트화랑 전시회에서는 작품도 판매되고 언론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내어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가 김환기의 미술 역사에서 황금기였으며, 가장 서정적이고 시적인 작품들이 탄생한 시기이다
서울 식구들은 큰딸이 가장 노릇을 하였으며 김환기 부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표지화를 그리다 전시회 제안이 들어왔다
두 번째 베네지트화랑 전시회 준비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친구들이 작업에 방해 될까 알리지 않고 상주없이 정중히 장례를 치렀다
루니아의 도움으로 남프랑스 니스 전시회를 위해 이사했으며 방송에도 나갔다
여러번 전시회를 하였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아 생활이 힘들어하는 동안 둘째 딸 김금자는 건축설계사가 되어 국전에서 특선하여 신문 기사에 났다
지난 3년간 매일 그린 시적이고 서정적인 200여 점의 그림이 파리에서는 관심이 없슴을 느끼고 1959년 4월 귀국하여 홍대 교수로 재직하다 1년간 월급을 받지 못해1961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반인 미술 지도하는 학원을 개업하여 학교일과 겸업하면서도 꾸준히 그림 작업을 하였다
1962년 청이를 양자로 들이고 홍대 미대학장이 되어도 여전히 생활은 궁핍했지만 달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그림 작업을 하여 개인전을 열었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김향안의 제안으로 그동안 모아둔 크고 작은 데생 100여점을 전시하여 판매금으로 새집에 입주하게 되었다
196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참가하는 7회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 참가단 대표로 김환기는 김포공항을 떠났지만 정부의 늦장으로 개막전 일주 후 도착하여 심사가 끝났다며 주최측에서 김환기(안좌도를 반추상으로 그린 <섬의 달밤>을 제출)에게 명예상을 주었다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예술에 의미가 있다고 여긴 김환기는 뉴욕으로 가서 한국전 당시 부산에서 도움 받은 브루나 문정관을 찾아가고 프랑스에서 <매화꽃이 있는 정원>을 구매한 원스턴 집에도 찾아갔다 훗날 원스턴은 죽기전 유언으로 그림을 본인에게 돌려 보내라하였으며 김환기의 딸과 아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재정보증도 서줬다
1964년 6월 김향안이 뉴욕으로 오고 9월에는 록펠러재단에서 김환기에게 1년 동안 제작 ㆍ연구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결정하여 경제적으로도 영주권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록펠러재단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자 일급 화상들이 방문하여 한 칭찬에 최고가 아닌 화랑에서는 전시를 하지 않으려했다
미국은 프랑스와 달리 그림을 투자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록펠러재단과 계약이 만료되어 김향안과 상의하지 않고 호의적인 타스카화랑과 2년 전시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전시 후 그림 판매 대금을 주지않을뿐 아니라 화랑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여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지만 단순히 화상이 원하는 그림 그리는 기능공이 아닌 창조적인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다짐 하면서 돈이 없어 전화번호부를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1970년 그리운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이 한국미술대상 수상.
신경통에 두통이 있었지만 보험료가 비싸 병원에 가지 못하고 몸에 기운이 없어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하루 열 시간 이상 작업을 하였다
1971년 데셋 부부로부터 맨해튼 일급 화랑에서 전시회 제의가 들어와 우주를 주제로 대작을 그렸으며 최순우의 도움으로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도 전시회를 개최하여 양쪽 모두 성황리에 마쳤고 뉴욕에서도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어 판매된 대형 그림 한 점이 캐딜락 한 대 값으로 1년 생활비가 되었다(김환기의 대작 가격은 2400 달러로 70년대 미국 종합병원 신참 의사 연봉이 1800달러 정도)
1974년 김환기는 통증이 심해 진찰하니 목 디스크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안정을 취하다 병원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열흘 간 의식불명으로 있다 61세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뉴욕 묘지에 안장되었고 김향안은 1992년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우고 2004년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1938년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추상화 김환기의 <론도>
김환기의 예술에 대한 자존심과 열정 못지않게
부인 변동림이 본명을 김향안으로 개명한 마음의 뜻과 김환기를 믿고 그의 뜻에 따라 평생 내조하고
사후 환기미술관 설립한 것 또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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