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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ㅡ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산숭해심山崇海深) => 유홍준 지음

더카나(더날카로운나) 2020. 2. 18. 10:21

 

추사 김정희ㅡ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산숭해심山崇海深) => 유홍준 지음

ㆍ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4대 명필 중 한 분

ㆍ김정희의 인장 중 불계공졸(不計工拙)-잘되고 못되고 가려지지 않는다라는 뜻

ㆍ조선시대 사대부의 지적 활동에서 문.사.철(文史哲)을 전공필수, 시.서.화를 교양필수로 삼았는데 추사는 이 모든 분야에서 A+를 받고도 남는 분이다

ㆍ충남 예산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월성위)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큰집을 짓게 되었고 추사가 연경을 다녀와 할아버지 묘소 앞에 심은 백송은 천년기념물이 되어있다

ㆍ추사는 여덟 살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 집안의 종손이 되었다

ㆍ서얼 출신이지만 청나라 문인들과 교유가 많았던 북학파 박제가를 어릴적에 스승으로 모셨으며, 24세 되던 1809년 추사는 호조참판이던 아버지 김노경 따라 연경에 동행하여 외국 견문을 넓히고 학문을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ㆍ후지쓰카는 청나라 경학을 연구하다 청나라 학술에 능통한 추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조선 후기 북학파 학자들과 청의 학문적 교류를 치밀하게 고증했으며, 2006년 후지스까의 아들 아키나오는 1만5,000여 점의 추사 관련 유물과 책자를 과천문화원에 기증하였다

ㆍ명의 양명학, 청의 고증학으로 학문의 발전과 변화가 있었으나 조선은 송나라 성리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1765년 실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담헌 홍대용의 연행 때부터 엄성과의 인연이 되어 한중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ㆍ추사 24세에 연경에서 청조 문화를 완성하고 선양에 일인자인 46세 운대 완원을 만나 서로 인물됨을 알아보고 책을 선물하며 친분을 쌓았으며 스승으로 모시고 귀국하여 자신의 아호를 완당이라 했다

ㆍ추사는 연경에서 금석학자이자 서예가며 경학의 대가인 담계 옹방강을 만나 그의 서재를 보고 귀국 후 자기 서재를 보담재라 했다

ㆍ추사는 조인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직접 확인하여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였으며 경주에 있는 신라 사찰인 무장사 방문길에 4대릉을 발견하였다

ㆍ1818년 부친이 시주하고 권하여 33세의 추사는 최고의 해서체 명작이자 생애 최대의 대작이라 할 높이 90센티미터에 길이 4.8미터인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섰다

ㆍ1815년 30살의 추사는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대사를 모시던 초의를 만나 평생의 벗이 되며 그가 보내주는 차를 아주 좋아했다

ㆍ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중 만덕사(오늘날 백련사) 아암 혜장 스님을 만나 역학계몽의 의미를 물으니 막힘없이 답하여 놀라 4년 뒤 만덕사 산자락 다산에 초당을 지어 옮긴 후 다산으로 불렸으며 초의를 다산에 소개하여 시, 학문, 차를 배우게 하였다.

ㆍ1819년 34세에 추사는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하자 순조는 왕실의 친척(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추사의 12촌 대고모 됨)이 급제하였음을 축하하였다

ㆍ38세에 규장각 대교,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 때 김우명의 비리를 보고하여 봉고파직 시키자 이후 원한을 품고 부친을 탄핵하여 김노경은 완도에 위리안치 되자 추사는 임금 행차 앞에서 꽹과리를 치는 격쟁으로 무고함을 호소했다

ㆍ41세에 예조참의, 44세에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 보덕을 지냄

ㆍ부친 김노경은 이.형.공.예.병.호 6조판서와 대사헌,판의금부사, 평양감사 등 20년간 요직을 지내는 특권을 누렸다

ㆍ추사는 함경도 삼수 갑산 내역을 소상히 아는 것으로 보아 금석학뿐만 아니라 역사지리학에도 많은 지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ㆍ노론인 추사는 당파를 넘어 청에서 들어온 수선화를 고려자기에 심어 남양주 여유당에 머물고 있는 남인인 다산 정약용에게 선물로 보냈고 학문을 논하며 교유하였다

ㆍ1832년 함흥감사로 가는 권돈인은 벗인 추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 탁본을 떠서 보냈다

ㆍ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성균관 대사서에 제수 되고 부친은 1835년에 판의금부사에 올랐으나 1837년에 돌아가셨고 1836년에는 다산 정약용이 75세로 별세하였다

ㆍ50대 추사는 국내뿐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학문과 예술에 대가의 위치 올랐으며 스승인 옹방강, 완원,건륭시대 4대가ㅡ담계 옹방강, 석암 유용, 산주 양동서, 몽루 왕문치등의 글씨도 열심히 썼다

ㆍ54세 때 헌종의 명으로 추사가 쓴 옥중서원 현판을 내렸다

ㆍ추사를 찾아 가르침 받은 제자에 양반 출신으로 석파 이하응, 역관 출신으로 역매 오경석, 중인 출신으로 서화가에 소치 허련 등이 있다

ㆍ우선 이상적은 역관 집안이며 중국 문인과 교유가 많았으며 추사가 제주도 유배중에 정성을 다하여 추사가 세한도 그림을 선물로 받은 인물이다

ㆍ소치 허련은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로부터 서화를 배웠으며 초의의 소개로 추사의 제자가 되어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 한 화가가 없다"라고 호평하였으며 원말 4대가 중 한 사람인 황공망의 호 대치를 빌려와 소치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ㆍ추사 55세 때 안동김씨의 모략으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면서 해남 대둔사에 들러 초의를 만나 무량수각 현판을 써주었고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도 대둔사에 있다

ㆍ제주 화북진은 우암 송시열이 있었고 훗날 면암 최익현이 유배를 지낸 곳으로 지금은 해신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ㆍ시는 상설가게, 장은 5일마다 여는 장마당을 뜻하며 합쳐 시장이라 부른다

ㆍ추사가 유배 중 서자인 상우 대신 종손으로 대를 이을 상무를 양자로 들였고 다음해 부인이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소치 허련과 벗인 초의가 돌아가며 제주를 방문하여 오래동안 머물렀고 무관이나 학신이 높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도움을 준 신헌이 전라우수사로 왔을 때 두사람을 소개 시켜줬다

ㆍ1844년 유배생활 5년 되던 해에 제자 우선 이상적이 지속적으로 귀한 서적을 연경에서 구해 보내는 등 변함없는 사제 의리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세한도를 그려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ㆍ추사는 제주 유배 중에도 대정향교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붓을 잘 만드는 필장 박혜백과 전각가 소산 오규일은 그들의 솜씨에 추사도 칭찬하였고 소산은 궁궐에 들어가 전각 일을 도맡아 하였으나 10년이 못 되어 눈이 멀었다

ㆍ9여 년 유배 생활 동안 많은 글씨 연습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필체를 터득하였으며 1849년 추사 64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용산 강상에서 지내다 2년 반만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1년간 귀양살이 후 과천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ㆍ용산의 강상에서 지낼 때는 제수를 고종사촌이 조달했을 정도로 살림이 빈곤하였으나 벗이자 영의정을 지내던 권돈인이나 초의와 서신왕래가 잦았다

ㆍ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로 고전을 무수히 임모하면서 글씨 연습을 하였으며 지필묵인 종이와 붓, 벼루, 먹이 조건에 맞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

ㆍ강상에서 지낼 때 석파 이하응에게 난초 그리는 법을 가르쳤으며 석파에게 추사는 5촌 아저씨가 된다

ㆍ안동 김씨 모략으로 권돈인은 좌천 되었고 추사는 북청으로 유배를 가서 너와집인 굴피집에서 지냈으며 동생인 명희와 상희는 향리로 추방 되었다

ㆍ북청에서도 제자를 가르치고 유적지를 답사하고 금석을 연구하면서 유배생활을 보내다 1852년 67세에 해배되어 부친이 구입해둔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지냈으며 1856년 71세에 광주 봉은사에서 <판전>현판을 쓰고 3일 뒤 세상을 떠났으며 예산 추사고택에 모셔졌다

ㆍ추사 생전 명성은 일본 뿐만아니라 청나라에서도 넓리 알려져 제자들을 통해 추사의 글씨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ㅡ추사 김정희

ㆍ쥐수염으로 만든 붓ㅡ서수필

ㆍ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ㅡ초미필

ㆍ늑대털로 만든 붓ㅡ낭호필

ㆍ다람쥐털로 만든 붓ㅡ청서필

 

ㆍ한자의 서체에는 크게 여덟 가지가 정리되어있는데, ,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대전(大篆), 소전(小篆) 예서(隷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구분합니다.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ㅡ오래 되었다하여 고문자로 지정

대전(大篆), 소전(小篆) ㅡ전서로 통하며, 진시황제 시기에 소전으로 문자를 통일

예서(隷書)ㅡ 읽고 쓰기 복잡한 전서를 벗어나 간단하게 고쳐 쓴 글자체

해서(楷書)ㅡ정체(正體), 정서라고도 하는데, 한나라의 채옹이라는 자가 신선(?)으로부터 배웠다고 전해지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이라는 여덟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永(길 영)자에 여덟 가지 구성이 모두 들어있다 함

초서(草書)ㅡ전서, 예서에서 파생된 흘림체

행서(行書)ㅡ정자체보다는 흘려 쓰고 흘림체인 초서보다는 바르게 쓴 약간 흘림체 행서입니다

山(뫼 산), 위부터 갑골문 금문 소전(전서) 예서 해서 초서 행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