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박물관의 말단 서기에서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관장에 오른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의문화유산 발굴과 보존을 위한 노력과 업적
ㆍ호림박물관은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유물을 방지하기 위해 혜곡 선생이 사업가 호림 윤장섭에게 건의하여 설립되었으면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과 함께 3대 사립박물관으로 손꼽힌다
ㆍ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희순에게 훗날 간송 전형필이 순우라는 필명과 혜곡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ㆍ최희순은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송도고보 졸업 후 세계 유일의 청기와, 금가루를 입힌 화금청자 등을 소장하고 있는 개성박물관에 들어가 고유섭 관장에게 역사, 유물 발굴, 보존등에 관해 배우면서, 신라 불상이 우수하듯 고려는 청자가 뛰어나므로 고려청자 가마터 찾는데 힘을 기울이다 1964년에 전남 강진에서 결국 가마터를 발견했다
ㆍ고려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호사스런 취미로 청자가 화려하고,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숭상으로 단아하고 소백한 백자가 발달
ㆍ1944년 관장이자 스승이며 문화유적 답사의 선구자였던 우현 고유섭 선생이 간경화로 39세 짧은 삶을 마감했다
ㆍ해방이 되자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고 유학파 김재원이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ㆍ최순우의 설득으로 지방박물관인 개성박물관이 국립박물관의 분관으로 승격되고 국립박물관원으로의 삶이 시작 되었다
ㆍ감은사지 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탑인 고선사지 3층석탑은 원효대사가 주지였던 절이다
ㆍ일본에는 많이 존재하지만 높이 22.7미터인 속리산 법주사 목조5층탑인 팔상전은 우리나라 유일한 목조탑이다
ㆍ1949년 4월 국군과 북한군 사이 개성 모악산 전투를 계기로 개성박물관 소장품을 본관으로 이관 되었고 그 해 여름 최순우도 본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ㆍ활발한 연구와 발표를 인정 받아 개성분관 서기에서 3년 만에 본관 박물감으로 승진하고
1950년 4월 17일 국보 특별 전시회를 계기로 전형필을 만나고 국보 문화재 해설에 관한 최순우의 글이 서울신문에 실렸다
ㆍ6.25전쟁으로 중요 서류와 유물을 포장하여 미군 트럭에 실어 부산으로 보내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광복 전 일본에 건너 가 후즈카 치카시 집 앞에서 몇 달 간 무릎 꿇고 사정해 되찾은 소전 손재형과 최순우는 보화각(현 간송박물관) 수장품을 북으로 보내기 위한 포장 작업에 차출 되었다. 포장 재료나 방법의 문제를 제기하며 늦장을 부려 시간을 끌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보화각 수장품을 지키게 되자 전형필이 최순우와 손재형에게 큰절을 했다고 한다
ㆍ전쟁으로 국군이 남으로 밀리자 경주박물관 일부 유물을 미국으로 피난 시키고 국립박물관 유물 또한 하와이로 이송하기 위해 포장 중 전쟁이 교착 상태로 빠지자 계획이 취소 되었다
ㆍ부산에서 피난 중 고유섭 선생에게 들은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목조 건물 중 하나인 부석사 누수 상태와 배흘림 기둥을 확인했고 1967년에 2차 조사에서 의상대사를 사모한 여인 선묘가 부석사 용이 되었다는 선묘화룡설화에 나오는 석룡이 불단 아래에 머리를 두고 꼬리가 앞뜰에 이르는지 실물을 조사했다
ㆍ전쟁이 끝난 후 최순우는 국립박물관 보급과장으로 임명 되었고 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ㆍ전쟁 중 보화각 유물 보전에 대한 보답으로 전형필로부터 최순우라는 필명과 혜곡이라는 호를 받고, 추사 김정희, 역매 오경석, 위창 오세창, 간송 전형필으로 이어오는 유물을 보는 감식안과 안목을 전수 받았다
ㆍ신문에 실리는 그의 글쓰기 영역은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사기에서 회화, 고미술, 민예품, 현대미술로 점차 영역을 넓혔다
ㆍ소전 손재형은 김홍도의 군선도(국보 제 139호),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와 금강전도(국보 제217호)를 호암 이병철에게 양도하여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다
ㆍ아내 박금섬은 남대문시장에서 좌판 장사를 하면서 헌신적으로 남편을 내조하여 최순우는 자신의 월급을 공부에 사용했으며 고졸에 공무원 출신이지만 홍익대에서 고미술 강의도 하였다
ㆍ1957년 12월 우리나라 국보의 해외 첫 전시회가 워싱턴을 시작으로 미국 순회 전시가 시작되었 으며 이 과정에서 선진화된 전시진열의 기법을 배우고 독창적이며 우수한 한국 문화재를 외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ㆍ겸재 정선는 각고의 노력으로 기존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산수화법인 진경산수를 성행하게 했다
ㆍ성공적인 미국 순회 국보 전시회 공으로 녹조소성훈장을 받았고, 1961년에는 유럽 순회 전시회를 통해 전쟁으로 가난한 나라가 아닌 우수하고 독창적인 문화를 가진 대한민국을 알렸다
ㆍ1962년 1월26일 유럽 순회 전시회 중 급성신우염으로 56세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두 번째 스승인 전형필의 부고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
ㆍ1960년 전형필과 최순우의 의견으로 국립박물관에서 발행하는 <미술자료>와 동인지 <고고미술>이 창간되어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
ㆍ연희전문학교에서 국사학과 국학을 가르치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된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막내 아들인 정양모는 발령대기 중에 최순우를 만나 무급이지만 나라를 위한 사명감으로 함께 일하자는 제의에 감사하며 일을 배우고자 동참하여 훗날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된다
ㆍ1963년 최순우가 처음 기획한 고미술 전시회인 `조선 시대 초상화 전시회'를 열면서 신문, 잡지에도 우리 문화를 알리는 많은 글을 실었다
ㆍ1936년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잡지에 강진군에서 청자파편이 발견됐다는 기록을 보고 1964년 5월 출장 간 최순우와 정양모는 훗날 청자장이 된 이용희의 집터에서 우현 선생이 찾으려 했던 청자 가마터를 발견하였으며 고려왕실에 보급하였고 고려사에 기록된 양이정 이라는 정자에 사용된 청자기와의 실제를 확인하게 되었다
ㆍ이경성의 설득으로 1966년 박물관의 만년 과장직을 그만두고 홍익대에 교수직으로 옳기려 했으나 박물관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을 바꿨다
ㆍ1966년 한일협정에 따른 반환 문화재에 대한 감정과 측정을 위한 우리측 대표로 참관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일황에게 진상했던 고려청자 97점을 환수했다
.1966년 도굴 흔적이 있는 석가탑 복원공사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라니경 발견
ㆍ김재원 관장이 정년 퇴임하고 후임인 김원룡 관장은 잘못된 무령왕릉 발굴의 책임을 지고 퇴임하고 자기보다 늦게 박물관에 입사한 황수영이 관장으로 취임하자 최순우는 충격을 받았다
ㆍ황수영 관장이 건강상 이유로 물러난 뒤 문교부에서 오래동안 박물관에 몸담은 최순우를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임명하였다
ㆍ1971년부터 조사와 발굴을 시작한 서울 암사동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뉘토기의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3000년경으로 한국 미술의 역사를 5000년으로 판단했으며, 이로인해 '한국 미술 5000년전' 전시회가 일본에서 60만 명, 미국에서 226만 명이 한국 문화재를 관람 하였다.
ㆍ1976년 간송미술관 건너편인 성북동으로 이사한 집은 ㅁ자 구조로 정원과 집안을 한국미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잘 꾸미어 조선시대 선비의 집 느낌이 든다고 한다
ㆍ1983년 중앙일보사 미술잡지<계간미술>에 근무하는 유홍준 기자의 기획으로 '미술계 식민잔재 청산'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ㆍ중앙청으로 박물관 이전을 생애 마지막 과업이라 여기고 진열 방식에 정성을 다했다
ㆍ1984년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68세에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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