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이야기=♣/지금 독서중!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경복궁 => 글 이향우ㆍ감수 나각순

더카나(더날카로운나) 2021. 1. 29. 08:27



저자는 조각가이자 우리궁궐지킴이로 활동 중이다
경복궁은 다섯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첫번째 법궁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 후 한양천도를 단행하여 건립한 것으로 정도전이 시경의 주아편 기취라는 시의 한 구절(이미 술에 마음껏 취하고 덕에 배가 불렀으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에서 인용한 큰 복이라는 뜻이다
궁은 왕과 가족 궁궐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뜻하고 궐은 건물을 둘러싼 궁장과 출입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를 말하여 이를 합쳐 궁궐이라 한다
경복궁의 왼쪽(동쪽)은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인 종묘, 오른쪽(서쪽)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번영과 안위를 빌었던 사직단을 두어 좌묘우사라 했다
1405년 태종 이방원 때 지어진 창덕궁이 이궁으로 사용하다 세종 때 경복궁을 중수하였고 성종에 이르러 황실 가족을 위해 창경궁을 짓고 경복궁을 법궁(왕이 정사를 돌보던 핵심 궁궐)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이궁(왕이 필요에 따라 쓰던 궁)으로 썼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경희궁 영건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재건(1868)하였고 고종 때 건청궁(1873)을 지었다
전각의 배치, 건물 이름 등 경복궁의 건축을 통해 유교적 이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주산은 백악이고남산을 안산으로, 좌청룡을 낙산, 우백호를 인왕산으로 두고 있다.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은 '광피사표, 교화만방(국왕의 큰 덕이 온 나라와 백성을 비춘다)'에서 따왔으며 남문이라 중앙의 홍례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왕이 다니며 동쪽 문으로 문관이, 서쪽 문으로 무관이 드나들었으며,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은 '봄을 세우다'라는 뜻으로 천장에 청룡이 그려져 있으며 왕실의 종친이나 상궁들이 출입하였고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하다'라는 뜻으로 천장에 백호가 그려져 있으며 승정원 관리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은 '신묘하고 뛰어난 무용'을의미하며 천장에 현무가 그려져 있으며 왕이 후원으로 이동 때에만 열었다
광화문은 1926년에 일제에 의해 해체되어 건춘문 옆으로 옮겨졌다가 6.25전쟁으로 완전 소실된 것을 2010년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사헌부는 관원들의 비리를 조사,탄핵하던 대표 사법기관.
흥례문을 지나면 서쪽에 궐내각사와 관원이 다니는유화문이 있고, 닷새마다 승정원의 국정사안을 전하는 기별청이 있다
흥례문을 지나면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으라는 의미의 금천교인 영제천을 건너는 영제교가 있으며 왕과 외부 공간을 구분 짓는다
경복궁의 세 번째 남문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조참 행사하는 곳으로 동쪽 일화문으로 문신이, 서쪽 월화문으로 무신이 출입하였고 동쪽 행각에 융문루, 서쪽 행각에 융무루가 있으며 융문루에는 법전을 비롯핫 서적류를 보관하고 사헌부 관리들이 조회에 참석한 관리들을 감독했다
근정전은 임금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지었으며 근정전 마당을 조정이라 부르며 국가의 공식행사가 치러졌다
근정전 조정의 물빠짐을 좋게 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 끝의 높이는 1미터 차이가 나며 행각 지붕이 낮아지는 꺾임과 기단이 낮아지게 됨을 볼 수 있다
근정전의 답도(왕이 밟는 길)에는 성군 정치를 기원하는 상상의 영물인 봉황이 새겨져 있다
상월대에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오를 수 있고 하월대에서는 악공들이 연주한다
상월대 양쪽에는 향을 피우는 향로가 있고, 하월대양쪽에는 화재 진압용 물이 담겨져 소방기구로 사용하는 드므가 있다
근정전 천장에는 일곱 개의 발톱을 가진 칠조룡이 그려져 있고 용상 뒤에는 해와 달, 오봉산(오악을 상징하며 왕이 다스리는 전 국토를 의미ㅡ동악의 금강산, 남악의 지리산, 서악의 묘향산, 북악의 백두산, 중악의 삼각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병(또는 일월오악도라고도 불림)이 그려져 있으며 왕조의 무궁한 번영과 임금의 덕치가 전 국토에 밤낮으로 비추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은 임금이 깊게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의미에서 정도전이 지었으며(서경에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내부 바닥이 우물마루라 겨울에는 난방이 되는 동쪽의 만춘전(만년의 봄)이나 서쪽의 천추전(천년의 가을ㅡ세종 때는 집현전 학사들이 사용)에서 집무를 봤다
사정전에서 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고, 세종은 20년, 성종은 25년 동안 신하와 함께 매일 경연을 열었다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고, 장영실에 의해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 기구가 발명되었고 박연이 아악을 정리하였다.
복원된 수정전은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후에는 군국기무처와 내각의 청사로 쓰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수정전 사이 행각이 설치되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정전 남쪽 행각에는 왕의 개인 물품을 보관하는 내탕고가 서쪽부터 천자문 순으로 있으며 동쪽 끝은 월자고이다
육조거리를 궐외각사라 한다면 수정전 앞뜰에는 실무 관청인 궐내각사로 왕을 보좌하고 왕의 자문 기구 역할을 하던 홍문관, 왕명출납을 맡던 승정원, 왕의 경호요원 선전관청, 왕을 호위하고 궁궐 수비를 담당하던 도총부, 규장각 등이 있었다
경회루는 태종 때 새롭게 지은 것으로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외국 사신 접대, 공신들의 연회, 기우제 등으로 사용하였다.
경회루 동쪽에는 어교인 자시문, 함흥문, 이견문 세 개의 문이 있다
경회루가 경복궁 서쪽에 지어진 이유는 불을 물로써 제압하려는데 있으며 2층은 누각이고 35칸의 큰 집이다.
경회루 연못 북쪽 물가에 연꽃 향이라는 작은 정자 하향정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당시 배희한 목수가 지었다
'오복을 향함'이라는 뜻을 지닌 향오문을 지나면 왕의 개인 생활공간인 강녕전이 나오며 여기서부터 내전 영역이 시작된다.
강녕은 <서경>의 홍범구주의 오복(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 중 세째이며 '강녕은 편안하고 건강함'을 의미하며 월대에서는 왕실 가족 행사를 하였고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곡와를 써서 마무리 하였다
1917년 창덕궁의 왕의 침전인 희정당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화재로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옮겨 지었고 현재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6년에 복원된 것이다
추녀마루에 있는 잡상은 토우의 일종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악귀의 침입을 막으며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순으로 이어집니다
새들이 단청을 더럽히는 것을 막기위해 설치된 그물망인 부시와 오지창이 처마밑에 설치되어 있다
동소침인 연생전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서소침인 경성전은 '완성함을 기뻐한다'는 뜻이며 뒤쪽에 있는 연길당과 응지당은 '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천상 물시계 옥루와 천문을 관측하는 선기옥형을 설치했던 건물인 흠경각은 공경함을 하늘같이 하여 백성들에게 절후를 알려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교태전은 '천지.음양이 잘 어우러져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이며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이다
함원전은 불사를 행하던 내불당으로 쓰이던 곳이다
교태전 뒤편 후원인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왕비를 위하여 조성된 인공 화계로 사철 즐길 수 있는 꽃과 나무를 심었으며 중앙에는 팔각기둥의 각면에 매화와 새가 그려진 화조도가 있고 십장생과 사군자등의 길상문이 박혀져 있는 팔각형의 굴뚝이 있다
아미산은 중국 산동성 명산으로 도교에서는 신선이사는 선경으로 여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한북정맥을 타고 삼각산에서 백악으로 이어져 아미산에 다다르며 아미산 동편 건순각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이어받아 왕비가 왕세자를 낳는 곳으로 양의 강건과 음의 유순에서 한 자씩 따왔다
자경전은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 조대비(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를 위해 지은 대비전으로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창경궁에 있던 자경전에서 비롯되었는데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경사가 임하기'를 뜻하는 말이다
자경전 서쪽 꽃담은 궁궐 꽃담 중 제일 아름다우며 주인인 조대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여러 문양과 대나무(절개), 영산홍, 국화, 모란, 복숭아,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박쥐 그림이 있으며 십장생이 그려진 굴뚝 담장은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궁궐 음식은 소주방에서 담당하였으며 주방상궁이 음식을 만들고 수라상궁이 상차림을 맡았으며 나이가 많은 기미상궁이 검식을 하였다
남자 전문 요리사를 대령숙수라 부르며 세습에 의해 기술을 전수했다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착한 성품을 기른다'라는 뜻으로 다음 보위를 이어갈 왕세자의 동궁전이며 문종이 20여 년간 세자 노릇을 했고 1441년에는 단종이 태어났다
사정전과 동궁을 구분하는 비현각은 세자의 집무 공간이며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세자시강원과 세자를 경호하는 세자익위사가 있었다
(북궐도형)을 살펴보면 경복궁 내 측간이 28군데 있었는데 일제 때 대부분 훼손되었던 것을 자선당과 비현각 두 곳에 복원하였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지냈던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 건물 뒤나 정원에서 볼일을 봐서 무되회가 있는 날은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집경당으로 가는 곳에 있는 풍기대는 기다란 깃대를 이용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는 기상 관측 기구이다
자경전 북쪽에 있는 흥복전은 왕의 후궁들이 살던 빈궁으로 현재 복원 중이다
흥복전 북쪽에 있는 집경당과 함화당은 주로 침전 영역으로 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고종 때는 외국사신 접견소로 사용하였다
세조 2년(1456) 취로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 자리에 고종 10년(1873)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연못 한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연꽃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뜻의 향로정을 지었다
연지 북쪽에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2년 빠른 1887년에 유입된 한국 최초의 전기발상지가 있다
1873년에 지은 '하늘이 맑다'라는 뜻의 건청궁은 궁궐 안의 궁으로 향원정 북쪽에 있으며 고종은 왕의 비자금인 내탕금을 써서 비밀리에 지었다
건청궁은 양반 사대부가처럼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고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며 왕의 처소인 장안당,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복수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종의 아관파천 후 일본은 건청궁을 헐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지어져 해방 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다 헐고 2007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 공사 직원과 낭인에 의해 장안당과 곤녕합 사이 뜰에서 시해되고 건청궁 동쪽 녹산에서 화장하여 뼈를 연못에 버린 시해사건이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이시즈카 에조가 쓴 <에조보고서>에 의해 그날 상황이 생생하게 알려졌다
건청궁 서쪽에 있는 집옥재는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라는 의미로 중국풍의 화려한 건물이며 고종이 사용한 서재로 귀한 서적을 보관했으며 외국인 접견장으로도 이용했으며 팔우정과 협길당과 함께 나란히 있다
팔우정 뒤편으로 왕이 경복궁 밖 후원 갈 때 다니던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있고 바깥은 청와대 가는 길이다
청와대 터는 고려의 이궁이 있던 궁궐 터로 조선왕조에서는 경복궁의 후원으로 사용하였으며 고종 때는 북원이라하여 융문당, 융무당, 춘안당, 옥련정과 왕이 친경하던 경농재와 적전이 있었고, 높은 지대인 경무대에서 군사훈련 점검이나 연회를 베풀었다.
일제 때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청사를 짓고 신무문 밖 북원에 총독관저를 지었으며 제1공화국 때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쓰면서 경무대로 바꿨다가 청와대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도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북쪽문으로 '무용을 넖힌다'는 뜻의 광무문과 '북쪽의 현무'라는 뜻의 계무문은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나 민초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경회루 서쪽에는 제례를 지내는 '하늘'이라 뜻의 태원전이 있는데 국장 때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다
태원전에서 경회루 방향으로 가다 예성문을 지나 있는 계단식 담장은 궁중 연회나 제례에 쓰이는 장을 보관하는 곳으로 큰 독에는 간장, 항아리에는 젓갈, 작은 단지에는 된장을 담았다

경복궁 10경
1경ㅡ근정전 월대 위에 올라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 일직선상에서 보기
2경ㅡ근정전 조정의 박석
3경ㅡ근정전 월대의 서수
4경ㅡ경회루 누각에서 보는 전각 지붕
5경ㅡ강녕전 월대에서 바라보는 지붕선
6경ㅡ함원전 뒤편 왕비의 우물
7경ㅡ교태전 뒤뜰의 아미산 굴뚝
8경ㅡ자미당 터에서 보는 꽃담
9경ㅡ자경전 뒤뜰의 십장생 굴뚝
10경ㅡ백악의 푸른 용과 향원정의 사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