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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 => 이양재 지음

더카나(더날카로운나) 2021. 1. 22. 08:19

저자는 고서 소장가이자 회화사 연구자이다
솔거이야기ㅡ 솔거는 신라 사람으로 경주 분황사 <관음보살>, 황룡사 <노송>, 진주 단속사 <유마상>을 그렸으며 황룡사 노송 벽화를 잘 그려 새가 날아와 부딪혀 떨어졌다고 한다
최경 이야기ㅡ 최경은 안산군 염부의 아들로 미천한 신분을 딛고 조선 초기 안견과 대등한 화가 였다
장승업 이야기 ㅡ 오원 장승업(1843~1897 55세)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서울 이응헌 집에서 지내며 아이들 글 읽는 소리로 글을 이해하였으나 알지못하였고 배우지도 않은 그림을 잘 그려 이응헌이 재료를 주고 그림에 전념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 4대 화가ㅡ 현동자 안견(조선 초기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 단원 김홍도(조선 후기 실경 산수화), 오원 장승업(근대 회화)
오원의 호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을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이라는 뜻의 오원으로 스스로 지었다
장승업이 젊은 시절 머슴살이 했던 역관 이응헌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세한도>를 받은 우선 이상적의 사위이며 고서화에 안목이 높은 감식가였으며 수표동에 위치한 이응헌의 집 주위에는 화원들이 많았고 도화서가 가까웠으며 자주 내왕하던 혜산 유숙(1827~1873)은 19세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였으며 장승업의 초년기 스승이 되었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의 산수화나풍속화의 유행에서 조선 말기에는 `모습의 유사함`보다 `뜻을 그려냄`을 중시하는 청나라의 남종화류 산수화를 추사 김정희가 주장하며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오원의 초기 작품은 청나라 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나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성을 가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어 간다
일호 남계우는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라 불렸다
오원보다 5살 많은 이응헌 집에서 지원을 받으며 초년 시절을 보내다 40대에 한성판윤을 지낸 역관 변원규 집에서 후원을 받으며 지냈다
오원 40세 이후 역관인 오경연(역매 오경석의 네 번째 동생이자 위창 오세창의 숙부)을 만나면서 중국 그림을 접하여 기명 절지도를 그렸다 한다
오원은 낙관을 한 뒤 방치해 자주 도장을 분실하여 위창 오세창이 여러 번 새겨 주었다 한다
을사조약 때 자결한 민영환의 소개로 화원과 감찰이라는 벼슬을 받아 궁에 들어가 고종의 명에 그림을 그리다 술 생각에 여러번 궁을 뛰쳐 나왔으며 민영환이 자기집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나 역시 술 생각에 집을 뛰쳐 나왔다고 한다
오원은 40세 전후로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을 제자로 가르쳤으며 오원은 어려서 글을 배우지 못하였기에 문자를 몰랐으므로 작품에는 심전 안중식이 낙관이나 화제를 한 것이 많이 있고 두 제자는 서화협회에서 많은 후진 양성에 힘섰다
오원이 40여 세에 이르러 결혼을 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룻밤을 치르고 부인을 버렸으며 그후 결혼하지 않았다
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정처 없는 방랑으로 자유분방하며 오원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 허련과는 조선 말기 화가로 쌍벽을 이루었다.
술을 좋아하는 연담 김명국(1600~?)에게 중이 지옥도를 그려 달라며 비단을 가져왔으나 화상과 비구를 그리고 술을 더 가져오자 덧칠하여 완성한 그림을 보고 중이 감탄하여 절을 하고 물러났다
호생관 최북(1712~1786)은 집안의 책을 팔아 술을 마시고 추운 겨울에 술에 취해 도성에서 얼어 죽었다
오원은 1894년 동학혁명, 1895년 명성 왕후 시해사건, 1896년 아관파천 등 조선의 역사가 어수선한 1897년 55세 평소 그의 뜻처럼 생을 조용히 마감했다
오원의 산수화 작품으로 간송 전형필이 오원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한 <미산이곡도>는 가장 서정적인 산수화로 오원이 복거산장자를 위하여 중국의 쓰촨성 미산의 산수를 그린 것이다
오원의 인물화에 묘사된 사람들은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제자인 소림과 심전의 인물도 또한 흡사하다
오원의 화조 및 영모화로는 오원의 활달한 성격이 잘 표현된 한 병풍으로 이루어졌을 호취도와 치순도, 유묘도, 삼준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노일도는 갈대와 기러기를 함께 그린 그림을 말하며 늙어서 편안히 지내라는 의미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인생 말년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오원이 창안한 것으로 여기는 기명 절지화는 화병,과일 등 소품을 그리는 것으로 오원이 40대 중반에 그린 <백물도권>이 명작이다
오원이 40대 이전에는 중국풍으로 그리다 40대부터는 중국 화가와 구분되면 중국 미술 사학계에서도 작품성을 높게 평가하며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기명 절지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을 시도 하였고 특히 화조화, 동물화, 기명 절지화를 많이 그렸다
오원은 전통 화법과 외래 화법을 종합 절충하여 최고의 예술 세계를 이뤘다
오원의 제자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은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현대 화단의 육대가(변관식, 허백련, 이상범, 노수현, 김은호, 박승무)와 관재 이도영, 묵로 이용우, 근원 김용준 등 이후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오원 장승업은 대원 장씨 무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를 일찍 여의고 10대에는 떠돌이 생활하다 10대 후반에 이응헌 집에서 더부살이 하였으며 이응헌의 집에는 중국 원, 명 이래의 이름난 사람들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수장하고 있어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20대 초반에 이응헌의 눈에 띄어 그림을 그리고 혜산 유숙의 제자가 된다
30대에 역매 오경석의 집에 드나들고 아들 위창 오세창을 알게 되었고 40대에 오경연의 집에 드나들었고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이 1890년 경까지 오원에게 그림을 배웠다
42세에 고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서 어병 10폭을 그리다 도망가자 민영환의 집에서 그림을 그린다
1897년 오원 장승업 55세에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