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무관생도들 => 이원규 저
대한제국 군대 장교 계급은
참위ㅡ부위ㅡ정위, 참령ㅡ부령ㅡ정령, 참장ㅡ부장ㅡ정장 순
ㆍ추정 이 갑 참령 추천으로 편입한 평안도 안주 농부 아들 이응준과 삼청동 양반 후손 지 석균, 10살 때 사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를 외운 수재이며 육군유년학교에서 편입한 안성 출신 홍 사익 등 삼청동 대한제국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은 1909년 폐교로 일본 사관학교로 1년 후배 포함 44명이 편입된다
ㆍ광무황제(고종)의 양위로 융희의 연호를 쓰는 순종 등극 후 일제에 의해 강제 군대 해산 되었다
ㆍ장충단ㅡ 명성황후를 지키다 희생된 장령과 임오군란 때 희생된 장령을 추모하는 곳으로 고종이 건립하고 순종이 비문을 씀
ㆍ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는 프랑스 제도를 본받았지만 기본 이념은 일본 정신의 근본인 무사도였다
ㆍ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일부 생도는 자퇴 귀국하였지만 선배 김현충, 지석규, 홍사익, 이응준은 나라에 충성할 것을 피로 맹세하면서 때를 기다리며 학업에 더 열중하여 홍사익은 전교312명 중 3위를 했다
ㆍ영친왕도 1907년에 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되어 육사 생활한다
ㆍ1912년 12월1일 견습사관 근무를 끝내고 마지막 무관생도 36명 중 동기 12명이 육사 입학
ㆍ육사 졸업 후 부대 배치되어 소위 임관 된 지석규는 보병 소대장이 되어 전투에 참전하고 이응준과 홍사익은 부대 소대장이 되었다
ㆍ1917년 이응준 포함 동기생은 중위로 진급하고 후배들도 소위 임관하면서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 44명 중 11명이 탈락하고 33명이 임관하였다
ㆍ이응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지나, 조선인 등 항일 운동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이갑 참령의 사윗감이 되어 한족회(안중근 형제, 홍범도 장군, 연해주에서 조선인의 정신적 지주인 최재형이 소속)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친하게 지냈고 이갑 참령의 묘 참배 후 독립 운동과 일본 장교 사이 극심한 고뇌로 위궤양이 생겨 본국으로 후송 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발생
ㆍ1919년 1월 손병희 선생은 만삭으로 국내에 있는 지석규의 아내를 밀사로 일본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 유학생도 결집하여 집단투쟁을 위한 준비 명령을 내림
ㆍ지석규는 행동 제약이 있어 아내를 훗날 2.8독립선언 주도한 백남규에게 밀사 내용을 전달
ㆍ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대감 아들 이회영 6형제는 전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ㆍ3.1운동 만세 후 김광서 선배 및 지석규, 이응준은 독립운동을 위해 귀국하였으나 홍사익은 사단장 추천으로 더 큰 일을 위해 육군대학 입학 시험 준비
ㆍ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이종혁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인 장교로 독립투사를 처형 한 후 많은 회의를 느끼고 탈출하여 마창인 이름으로 항일 투쟁
ㆍ김광서 선배와 지석규는 평양에서 단둥을 거쳐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하여 교관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두명에게 5만원(1만원은 현재 30억원)의 현상수배를 걸었다
ㆍ1910년 이회영, 이시형 6형제는 전재산 40만원으로 독립 운동과 신흥무관학교 개교에 받치고 자신들은 굶주리며 근근히 생활하였다
ㆍ3.1만세운동 확산을 막기위해 군이 투입되고 양민 29명을 교회에 감금 후 불을 질러 학살시키는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발생 배후 인물인 우쓰노미야 사령관은 권총분실로 곤혹을 치르는 이응준을 설득하여 자기 직속 부대에 복귀시킨다
ㆍ경신참변 ㅡ1920년 10월 일본군이 마적단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 습격하게 하여 마적단 토벌 명분으로 만주 출병했고 일본군 3천 명 사상을 낸 청산리 전투 보복으로 북간도의 100만인 조선인 중 3만명을 학살하는 사건
ㆍ지석규는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독립군을 이끌고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 시베리아 치타로 이동 후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서 김경천 이름(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도 알려져 있다)으로 독립운동 활동 중인 선배 김광서를 만난다
ㆍ일제에 동조하는 무관학교를 졸업한 동기인 이응준, 홍사익등과 후배들에게 격분을 느끼는 지석규(예명으로 이청천)
ㆍ독립군 총사령관이 된 지석규는 독립군과 중국 연합군으로 구성된 600명으로 1600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대전자령 대첩을 성공 후 일본군의 보복을 대비 난징으로 옮겨 1934년 2월에 중국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 총책임자가 되었고, 김구 주석이 고문, 21살에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범석이 학생대장을 맡았다
ㆍ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되고 지석규는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ㆍ약산 김원봉이 젊은 시절 조직한 조선의열단이 조선의용대로 커진 후 108여단장으로 온 홍사익 장군 부대와 간접적으로 부딪히곤 했다
ㆍ독립투사 현익철을 홍사익이 회유하여 첩자로 보냈으나 불응시 부모와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바로 김원봉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ㆍ이응준은 용산 기차정거장 물류 담당이 되어 강연과 신문 기사등 적극 지원하며 원산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 광복이 되자 소련군이 들어와 가까스로 원산을 탈출 후 치안 책임자가 된 조병옥에게 군창설 관한 조언으로 미군정의 신임을 받았다
ㆍ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한 만주에 있는 광복군은 국가의 지원이 없는 개인 자격 입국으로 난항을 겪는 사이 미군정은 이응준에게 국군 창설을 의뢰하고 이 승만대통령의 추천으로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고 대한민국 최초 별을 단 장군이 된다
ㆍ홍사익은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속된 후 중장으로 진급하여 병감총감을 맡았으나 1945년 8월 일본 항복으로 미군 포로가 되어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46년 9월26일 58세로 처형 됨
ㆍ지석규의 광복군 부대는 미국OSS(전략사무국)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을 위한 특수전 훈련을 마치고 국내 진입 대기 중 일본의 항복으로 계획은 취소 되었다
ㆍ지석규는 이승만의 설득으로 1947년4월 21일 함께 귀국 1948년 8월 초대 대통령 이 승만,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 범석, 무임소장관 지 석규(임명은 되었으나 바로 사임)로 임명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국군의 중심은 이응준을 대표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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