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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에 들다 => 글 한영우. 사진 김대벽

더카나(더날카로운나) 2021. 4. 4. 11:38


창경궁, 창덕궁으로 떠나는 우리 역사 기행
저자는 1938년 서산 출생으로 서울대 사학과 석사, 박사 학위 취득. 서울대 명예교수, 규장각 관장
사진작가 김대벽은 1929년 함경북도 행영 출생.
한옥과 궁궐 등 전통 문화 관련 촬영 전문
경복궁ㅡ태조4년(1395), 창덕궁ㅡ태종5년(1405), 창경궁ㅡ성종15년(1484),  경희궁(원래는 경덕궁)ㅡ광해군14년(1622),  경운궁(1907년 덕수궁으로 개명)ㅡ고종(1897)에 준공하였다
조선 왕조 기간 경복궁이 225년, 창덕궁이 505년, 창경궁이 426년, 경희궁이 246년 동안 궁궐 역할을 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은 이유는 표면적으로 명당이 아니라는 데 있지만 왕실 내부의 골육상잔의 비극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궁궐은 정치공간, 왕실의 생활공간, 궁중 관청의  행정공간으로 나뉘며 정치공간은 치조라하며 임금과 신하가 조회하는 집을 정전 또는 법전이라 하며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경희궁의 승정전이 여기에 해당한다.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는 집을 편전이라 하며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과 희정당, 창경궁의 문정전 등이 있다.
생활 공간은 연조, 침전, 내전이라 부르며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이 있다.
궁중 관청의 행정 공간은 외조 또는 궐내각사라 했으며 비서기관인 승정원, 대신들의 회의를 갖는 빈청, 임금의 자문을 맡은 예문관, 홍문관, 내시가 거처하는 내반원, 국새 등을 담당하는 상서원, 궁중 음식을 맡은 사옹원  등이 있다.
순조 때 제작된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 동궐도, 헌종과 순종 때 편찬된 궁궐지, 궁궐의 설계도인 동궐도형, 의궤에서 궁궐의 역사와 변천 모습을 여볼 수 있다
임금이 시랑한 궁궐 창덕궁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창경궁의 흥화문, 경운궁(덕수궁)의 인화문이 궁궐의 정문이며 모두 <화(化)>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창덕궁의 돈화문은 백성을 가르쳐 감화한다는 뜻이다
돈화문에 들어서면 북쪽으로 어도가 있으며 왼쪽 즉 서쪽 행각에는 오행사상에 근거해 금이고 호랑이인 금호문이 있고 행각 북쪽으로 문을 지키는 군인 근무했던 남소, 위장소가 있고 항각 남쪽으로 무기고인 무비사와 임금이 거동할 때 사용하던 도구인 의장을 보관하는 의장고가 있다
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에게 조하를 받는 곳으로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지 정치를 논하는 장소가 아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는 월대가 있어 위엄이 있어 보이나 창경궁 인정전에는 월대가 없으며 앞의 마당을 조정이라 하여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줄을 서는 품계석이 놓여있다
인정전 내부에는 용상이 있고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가리개)이 있고 뒤에는 일월오봉병이 두리쳐 있으며 용상 위에는 당가(비, 이슬, 먼지 따위를 막기 위해 궁전 안의 옥좌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가 있고 천장에는 목각으로 만든 봉황 두 마리가 있다
인정전 남문은 인정문, 서문은 숭범문, 동문은 광범문이며 동쪽 행각(동월랑)에는 악기고(의식에 필요한 악기 보관), 육선루(이, 호, 예, 병, 형, 공 6방의 문서 보관), 광범문, 서방색(임금의 붓과 벼루 등을 공급하는 곳), 제의문, 관광청(궁중의 과거를 관장)이 있다
서쪽 행각(서월랑)에는 내삼청(궁궐 수비ㅡ내금위, 겸사복, 우림위를 통틀어 일컫으며 현종7년(1666)에 금군청으로 통합), 숭범문, 향실(제사에 쓰는 축문과 향을 관리), 예문관(임금의 글과 명령을 대신 짓는 관청)이 있다
1910년 경술 국치의 망국의 조약이 인정전에서 맺어졌다
앞 임금이 별세한 궁궐의 법전, 정문에서 다음 임금은 즉위식을 하게 되어 있다
인정문은 즉위식이 행하는 곳이기에 앞 마당에 나무가 없다
정전의 정문과 궁궐 대문 사이에 흐르는 개울을 금천이라 하며 다리를 금천교라 하고 궁궐의 안팎을 구별하고 배산임수의 의미를 살리기 위함이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남쪽 행각에는 내병조(궁중 자물쇠 관리 및 궐문 출입하는 사람을 감시ㅡ근장군사), 호위청(궁중 수호를 위한 군대로 공신이나 척신 혹은 임금의 장인인 국구가 대장을 맡는다), 상서원(임금의 옥새와 절월, 마패 등을 관장)이 있다
인정전 서편에 궐내각사가 있으며 북쪽에는 임금의 초상인 어진을 모시는 H자형의 선원전(진전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방화수이자 악귀를 쫓는 드므가 네 개 설치되어 있고, 양지당은 어진이나 어서를 담은 궤를 보관하고 임금이 선원전에 전배하기 전 재숙하던 집이다.
영의사는 '영원히 어재실에 의지한다'는 뜻으로 선원전에서 제사를 올리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인정전 서편 궐내각사에는 옥당(홍문관), 내의원, 이문원(규장각), 억석루, 영의사, 장수실 등이 있다
홍문관은 서적 관장, 임금의 교지 작성, 사헌부 및 사간원과 함께 정치를 비판하는 언관 기능도 수행하나 실권은 없지만 중책인지라 과거 합격자 중 성적우수자로 임명하고 정승급으로 올라 갈 수 있는 청요직으로 불렸다
대유재는 신하나 임금이 재숙하는 곳이고 동이루는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다
소유재는 책을 관리하는 검서관이 수직하는 공간으로 정조 때(1795) 지었으며 정조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처럼 서얼 출신도 검서관으로 등용하였다
인정전 동남쪽 궐내각사에는 고위직 신하들이 회의하는 빈청은 숙종 때는 어차고(임금의 가마를 넣어 두는 곳)로 이용되었다
선정전은 인정전 동편에 있으며 청기와를 올려 위엄을 표했고 바닥은 마루이고 옥좌와 일월오봉병이 있으며 임금이 신하와 정치를 논하는 편전으로 정사를 논할 때는 예문관에서 파견된 사관과 승정원에서 파견된 주서가 회의 내용을 기록했으며 이를 사초라 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이용했다
선정전 북쪽에는 장독대와 숲이 가까이 있는 보경에서는 세조 때 생일 잔치, 학문 토론, 성종 때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연산군 초기에는 문신, 무신의 강의가 있었고 장녹수와 방탕한 사랑이 있었던 곳이다.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누마루집 형태의 희정당은 순조33년(1833)에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일본의 뜻에 따라 옮겨 새로 지으면서 서양식 가구들이 들어왔다
왕비의 침전이자 정치 공간인 대조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서 지어 용마루가 없는 무용각이며 월대가 있으며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용마루는 용을 상징하는데 왕비의 처소에 용이 있다는 것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다
후궁을 비롯 여러 직급의 궁녀들이 속해있는 내명부를 왕비가 다스리며 궁녀 중에 왕자를 낳으면 후궁의 최고 직급인 빈이 되며 정1품이다
대조전은 침전이라 성종, 인조, 효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2층집은 아래층을 '각'이라하고, 위층을 '루'라고 부른다(아래층은 규장각, 위층은 주합루)
동궐도에 경훈각과 주합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없다
창덕궁의 푸른 기와집은 경훈각과 편전인 선정전뿐이며 경훈각에는 선조가 명나라 신종에게 받은 망의(곤룡포와 비슷한 관복),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이 새겨진 편액이 있는 곳이라 신선한 곳의 뜻에서 푸른 기와를 얹은 듯 하나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만경전을 헐어 단층으로 건립한 것이 현존하는 것이다
창덕궁 동쪽에 있는 성적각은 헌종 때는 왕세자 교육하는 곳이었으며 영조 때는 신하를 소견하는 장이었고, 정조 때는 세자궁으로 중희당이 건설되면서 성적각은 임금의 편전으로 많이 사용 되었으며 성적각의 북쪽 관물헌에서 서연(왕세자 교육)하였고 정조 때는 경서 시험을 치렀고 고종21년(1884) 갑신정변 때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당이 고종을 모시고 청나라 군대와 맞선 곳이기도 하다
성정각 북쪽에 있는 제정각은 혼천의, 선기와 옥형(시계)등 천문기구를 설치하여 천문과 시간을 측정하는 곳으로 순조 33년에 불탔다가 이듬해 중건 되었다
정조6년에 후궁인 의빈 성씨에게서 태어난 문효세자는 중희당에서 세자 책봉과 가례를 치렀으나 요절하여 효창묘에 안치되었으며 지금 용산구의 효창공원이다
중희당은 현존하지 않고 후원으로 가는 길이 되었고 동편에 칠분서 월랑과 삼삼와(육각정)이 있고 복도 끝에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소주합루(아래층은 의신합이라 부르며 세자의 독서와 휴식공간이었을 듯)가 지금은 승화루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마당에 학과 괴석이 있고 단청이 없는 소박한 형태의 팔작집인 연영합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의 호가 학석이라는 점에서 그의 처소로 보는 것이 합당하며 화청관이라고 쓴 일각대문의 문기둥에는 유일하게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현존하지않고 이 자리는 낙성재 후원 정자인 상량정이 들어서 있다
할아버지 정조를 닮아 영특했던 효명세자는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젊음을 바친 야심적인 세자였지만 대리청정 3년만에 22세에 별세했다

창경궁의 빛과 어둠
창경궁은 성종15년(1481)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와 생모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비인 안순왕후 한씨(한백륜의 딸) 등 세 분의 대비를 모시는 처소이자 임금의 거처 공간으로 지었으며 각 전당의 이름은 당시 문필가인 서거정이 지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뿐만 아니라 전체가 동향이라 별궁의 기능을 했으며 홍화문 앞에서 무과 시험장소로 자주 사용하였고, 영조, 정조 때는 백성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창덕궁의 인정전보다 다소 작으나 박석이 깔려있고 품계석이 세워져 있으며 남쪽에 임금의 편전인 문정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비를 맞지않고 왕래가 가능하다
중종이 창경궁 환경전에서 별세하였으므로 인종은 창경궁 명정전에서 즉위하였고 내부에는 일월오봉병이 둘러진 어좌와 천정에는 먼지를 막아주는 닫집이 올려있고 바닥에는 전돌이 깔려있다
임금이 신하를 소견하고 경연을 행했던 편전 문정전은 어좌가 있고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노론과 소론 사이 정책의 희생양으로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숨을 거두는 임오화변이 일어난 곳이며, 고종 15년에 철종비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은 용마루가 있으며 철종비와 명성왕후 민씨,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빈전으로 쓰였다
경춘전은 환경전 서쪽에 있으며 누마루 형식이고 대비전으로 인수대비가 승하했고 정조와 헌종이 탄행하고 인현왕후 민씨가 승하했다
양화당은 임금의 편전으로 명종은 친시(임금이 직접 시험을 관장하고 성적을 매기는 일)를 행했으며 병조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렀다
통명전은 창경궁 왕비의 침전이자 시어소(임금이 궁전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집)로 창덕궁의 대조전에 해당되며 창경궁 전당 중에서 이용도가 가장 높으며 서거정이 이름을 붙였다
성종 때 지어진 통명전은 정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순조 때 재건하여 현존하고 무량각이며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모해하여 폐위시키기 위해 흉물을 주변에 묻어두었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통명전 마당에는 연못과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은 임금의 침전이나 편전보다 크고 짜임새가 있으며 대비를 위한 연회 장소나 진작(작위를 높일 때 행하는 의식) 행사를 거행했으나 고종10년(1873)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솔밭이다
집복헌은 후궁이 살던 곳으로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가 이곳에서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가 순조를 이곳에서 낳으며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를 너무 사랑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였고 가까운 영춘헌에서 자주 들러 독서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창경궁은 기본적으로 대비와 왕비 그리고 세자의 생활 공간이면서 때로,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편전으로 이용하였기에 많은 궐내각사가 있었다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있는 낙선재는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의 처소로 세워졌으나 고종13년 경복궁 화재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주로 정사를 보다 가끔 낙선재를 편전으로 이용했으며 갑신정변 직후에는 주로 낙선재에서 집무했다
순종은 1907년 황제위를 받고 주로 낙선재에서 거주했고,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로 창덕궁과 낙선재 중건 공사를 벌였는데 낙선재 겉모습은 한국식이지만 내부는 일본식 건물이나 다름없는 것을 1997년 원래 모습으로 많은 부분을 복원하였다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의 편액은 대원군이 쓴 글씨이며 정면 돌담 뒤에 상량정(평원루)이 보이고 후원의 만월문과 담장의 꽃과 글자 무늬 장식이 일품이다
평원루에서 서울 도심과 인왕산, 창덕궁 전당을 바라보는 경치는 일품이며 낙선재 후원의 한정당은 별당으로 쓰였으며 후원의 화단과 굴뚝, 괴석의 배치가 아름답다.
낙선재 동편에 있는 석복헌은 왕비를 비롯한 여인을 위한 공간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은 본래 담장이 없었으며 백여 개 이상이었던 누각과 정자는 현재 누 18채, 정자 22채가 남아있으며 정자의 규모가 작은 이유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도 있지만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려는 통치 이념이 반영 된 것이다
후원의 정문인 취하문을 지나면 정방형 연못인 부용지가 보이고 북쪽  언덕에 정조가 지은 2층 누각이 있으며 위층은 주합루, 아래층은 규장각이라는 편액을 걸고 있으며 단순히 임금의 어제(글)와 어필(글씨)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보필하는 국왕 직속의 근시 기구로 개편하였다
규장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별 중에서 문장을 맡은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라는 뜻이며, 주합이라는 말은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고종은 정조를 본따 근대화를 이루려고 주합루와 규장각을 모방하여 경복궁에 건청궁을 세웠다
책의 향기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서향각의 편액은 정조시대 조윤형이 썼으며 주합루에 봉안된 임금의 초상화, 글, 글씨를 말리는 곳이었지만, 일제 때 누에 치는 곳으로 만들었다
희우정은 인조때 지은 취향정이라는 초당이었으나 숙종 때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려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희우정으로 고쳤다
천석정은 임금의 휴식처이지만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천석정이라 했으며 넓고 시원하다는 뜻의 '제월광풍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합루의 남문인 어수문은 정조가 세운 것으로 임금과 신하가 물고기와 물처럼 한 몸이 되자는 뜻이 담겨있고 부용지 남쪽에는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인 정조가 지은 부용정이 있고 정조가 상량문을 직접 지었다
부용지는 정방형의 연못은 땅을, 중앙에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
영화당 앞마당인 춘당대(서총대라고도 부름)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곳으로 임금이 참관했으며 임금이 활쏘기 연습, 기우제, 중국 황제를 향해 절을 하는 망배례, 연회 등 국가의 공식, 비공식 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금마문을 지나면 익종이 쓴 상량문에 따르면 책 수 만 권을 비치한 독서처인 의두합과 운영거가 있다
애련진 남쪽에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 늙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아치형의 돌로 된 불로문이 동향으로 서 있으며 앞에는 작은 불로지 연못이 있다
단청이 없는 사대부집 형태인 연경당은 익종(효명세자)이 세자로 있을 때 순조와 순원왕후의 진찬(제사를 지낼 때, 강신이 끝난 다음에 주식을 제상에 벌여 놓은 일)을 위해 지은 집이므로 정성이 담긴 건물이며 대문인 장락문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고 문 앞쪽에 흐르는 개천을 은하수라 여겨 다리를 오작교라 붙였고 옆에는 달의 정령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네 마리 있다
<동궐도>에 있는 연경당과 현재와는 차이가 있으며 헌종 이후 재건한 듯 하다
지붕 처마가 2층이면서 육각인 존덕정은 왜란에 소실된 것을 인조 22년에 재건하였으며 정조의 글귀(만 개의 거울을 비추는 둥근 달에 자신을 비유한 '만천명월주옹자서')를 게판으로 걸었고 천정에는 왕을 상징하는 청룡과 황룡이 곱게 그려져 있다
정자 북쪽에는 둥근 하늘을 뜻하는 반월형 연못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이 나란히 있고 정자 남쪽에는 세 개의 연못과 두 개의 정자가 표주박 모양의 반도지가 있으며 1907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창덕궁 후원의 가장 북쪽에는 옥류천
큰바위에는 숙종의 어제시와 인조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성종과 선조의 어필이 게판으로 걸려있는 소요정과 네 개의 기둥 위에 팔각 천정에 둥근 지붕의 특이함을 가진 '맑은 잔물결'이란 뜻의 청의정 등 옥류천 주위에 여러 정자가 있고, 휴식 공간은 물론, 시험하는 장소였던 농산정이 있다
관덕정은 공혜왕후 한씨가 뽕을 따고 잠례를 행했던 잠단 자리에 세워진 정자로 부근 단풍이 아름답다
<동궐도>ㅡ순종의 아들 효명세자(익종)의 대리청정 시대(1827~1830)에 제작된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으로 각 건물의 편액 글씨, 공간 배치와 구조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궁궐지> 헌종 때와 순종 때 편찬된 것으로 전당별 위치와 정치적 문화적 사건을 기록

임금이 사랑한 궁궐 창덕궁
ㅡ임금의 즉위식이 열리던 인정문
ㅡ내명부를 이끌던 왕비의 침실. 대조전
ㅡ노모를 위해 마당에 등불을 매단 왕의 효심. 수정전
ㅡ갑신정변의 풍랑이 휩쓸고 간 자리. 관문헌
ㅡ고종과 명성왕후가 백년가약을 맺은 중희당

왕의 효심이 빚은 궁궐 창경궁
ㅡ가난한 백성을 위해 임금이 쌀을 나누던 홍화문
ㅡ사도세자의 목숨이 쓰러진 문정전
ㅡ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남긴 곳. 자경전
ㅡ천하를 쥐려는 장희빈의 욕망. 통명전
ㅡ조선의 마지막 왕족이 머물던  자리. 낙선재

동궐의 속살 후원
ㅡ흥취를 이기지 못한 세자가 남긴 글귀. 능허정 일대
ㅡ문명국가의 자부심이 펼쳐진 대보단
ㅡ농사 짓는 임금과 비단 짓는 중전을 만나는 곳.  내농포
ㅡ연꽃을 사랑하는 숙종의 마음. 애련정
ㅡ문예 부흥을 향한 정조의 원대한 꿈이 담긴 주합루